패션지 W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띄엄띄엄 <W>의 기사를 번역했다. 전부 패션 기사였으며, 단신과 인터뷰를 포함해 패션 디자이너를 다룬 글이 대다수였다.

지금껏 가장 많이 번역한 매체가 잡지인데 <W>가 그 본격적인 시작이었던 셈. 그리고 글의 종류로 따지면 가장 많이 번역한 게 인터뷰인데 그 시작 또한 <W>였던 셈.

이게 다가 아닌데 지금 가지고 있는 건 더 없다. 내가 번역한 글이 실리지 않은 이슈도 아마 섞여 있을지 모르겠다.

경력의 초창기였던 만큼 이 잡지를 번역하면서 출판물 번역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잡지 번역은 보통 일정이 굉장히 촉박하기 때문에 에디터와 피드백을 주고받거나 역자 교정을 할 여유가 없다. 더군다나 <W>는 어차피 나중에 에디터가 많이 손을 보기 때문에 거칠게 번역해도 좋으니 마감을 지켜달라고 주문했었다. 그러니 누가 가르쳐준 것은 아니고, 책이 나온 뒤 인쇄된 글을 내가 보낸 번역과 꼼꼼히 대조해보는 과정을 통해 일종의 독학을 했다(그 무렵 에이전시를 통해 다른 몇몇 잡지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책을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편집이 됐는지 거의 확인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과정은 이후 디자인지 <CA>와 <GRAPHIC> 번역을 정기적으로 맡으면서도 빠짐없이 이어갔다.

그리하여 가장 중요하게는 가독성에 중점을 두게 되면서 초보 티가 나는 번역, 말하자면 까슬까슬한 번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 처음부터도 아주 거칠게 번역했던 적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당시엔 매끄럽게 읽힌다고 느꼈으나 나중에 읽어보니 너무너무 부끄러워서 울고 싶었던 번역이 한두 개가 아니다. '니 번역 니나 잘 읽히지'의 시절이었다고나 할까. 그 시절에는 혹시나 오역을 하게 될까 노심초사하며 '정확성'에 초점을 맞췄다면(그도 그럴 것이 인문대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면서 번역을 시작했기 때문에) 뭣보다 한국어로 잘 읽혀야 한다는 쪽으로 홀가분하게 방향을 튼 것인데, 이후로 내가 주로 하게 된 작업에는 이쪽이 맞았다.
하지만 물론 기교나 상상을 첨가한 번역은 체질에도 맞지 않고 할 줄도 몰라서 하지 않는다. 그러다간 엉터리 번역이 되기 십상이기도 하고. 단어 하나하나에 얽매이는 데서 벗어나는 대신 국문을 다듬는 데 많은 공을 쏟게 됐다는 뜻이다.

두 번째로 배운 것은 번역 기사의 편집에 대한 것이다. 전문지에서는 내용을 뭉텅이로 들어낸다거나 원문의 표현을 국내 독자들에게 맞춰 바꾼다거나 하는 일이 별로 없지만, 주류 패션지는 그 특성상 에디팅이 매우 과감하게 이루어진다. 영어 원문이 한국 에디터의 손을 통해 어떻게 가공되는지를 살펴본 경험은 다른 내 작업으로 직결되지는 않았을지언정 '잡지 번역'(특히 '인터뷰 번역')을 해나가는 데 있어 좋은 참고점 혹은 밑거름이 됐던 것 같다. 그러다 급기야는 잡지 에디터가 되기도 했고.

위에 링크한 글에 썼다시피 번역을 얼떨결에 직업으로 삼게 된 탓에 번역 수업이라는 걸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후에는 수업을 좀 알아보기도 했지만 수강료가 없어서 차일피일 미뤘고, 미루다 보니 어느새 경력이 쌓여버려서 들을 필요가 없게 됐다. 무슨 배짱인지 번역 관련 책조차 하나도 안 읽었는데, 그건 인터넷으로 접한 이런저런 번역 '공식' 같은 것에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수업도 들어보고 책으로 공부도 하면서 시작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여하튼 <W> 번역은 여러모로 굉장히 재미있고 유익했고, 좋아하는 작업이었다. 패션계가 진짜 (생각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세계라는 걸 알려주기도 했고. 한번은 별책 부록으로 제작된 WWD 100주년 기념 책자의 절반 이상을 번역하면서 현대 패션사를 엿볼 수 있는 기회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선 조만간 따로 포스팅하도록 하겠다.

음, 이런 이야기를 쓰려고 했던 게 아니라 번역했던 기사를 몇 개 찾아서 올리려고 했었지만 다음을 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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